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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by's Lab
2025년 회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찬란함을 위해 본문
들어가면서
올해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다들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는 엄청 넘어지기도 하고, 그로부터 배우려고 하기도 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궁금하더군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실패를 하는데, 왜 다시 일어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저의 1년을 돌아보면서 이 놈은 왜 자꾸 일어나는지 한 번 보려고 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래서 이번 회고록은 욕심 내서 소설처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전부 풀어야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거 같더군요.
2025년 1월부터 12월까지 있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풀어봤습니다. 이 놈은 왜 자꾸만 일어설까요. 저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시고, 여러분들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답을 찾은 거 같습니다.
목차
- 인턴의 따뜻한 겨울
- 수학이 필요한가?
- 때가 되었다
- 다녀왔습니다, 좋은 소식과 함께
- 제발 에고를 죽여
- OMS 3: 나 뿐만이 아니야
- 꿈은 이루어지나? (쉬어가며)
- 실패를 배운 적이 없기에
- OMS 4: Doby will return with OMS 5…
- 반드시 너를 이긴다
- 욕심 많은 스페셜리스트
- 이별을 기다리며
- 글을 마치며
인턴의 따뜻한 겨울
1월은 늘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 찬다. 올해는 시작 자체를 새로운 장소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울산이 아닌 곳, 대전에서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하고, 제야의 종 행사를 유튜브 실시간으로 보면서 새해가 왔음을 실감했다. 왜 대전에 있었냐면, 연구소 인턴을 하게 되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학부연구생으로 참여 중인 연구실의 지도 교수님께서 ‘연구자로 살겠다면, 연구소를 한 번 경험해보는 게 좋겠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동계연구연수생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 합격하여 새해 시작을 대전에서 하게 되었다.


엄청 추운 날, 작년 12월에 종강하자마자 아버지의 차로 짐들을 옮기며, 대전으로 향했다. 나에게 대전이라 함은 빵의 도시, 군 시절 후반기 교육 때 정보통신학교가 전부였다. 아주 어린 시절 기억도 하나 있는데, 대전 동물원? 사실 이건 대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추억들을 회상하며, 짐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혼자 다이소에 가서 자취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샀다. (자취 초보라 여러 번 갔다…) 이때는 몰랐다. 잠깐 대전에 있는 이 2개월 동안 또 많은 추억들이 생길 것이라는 것 말이다.
1월 2일 첫 출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인턴이고,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는 연구소라 긴장할 법도 하지 않은가. 물론, 내 업무에 대한 보고 발표 날은 긴장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첫 출근 당시에 긴장은 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긴장 할 여유도 없었다. 이 2개월 동안 인턴 뿐만이 아니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작품… 대학원 컨택… 이 2가지는 올 한 해 거의 끝까지 나를 시달리게 했었다. 회고록 중 여러 번 등장할 것이다.
아무튼 첫 출근이었다. 부서가 있고 내부에 여러 팀으로 구성된 체계였고, 나 포함 인턴 동기가 6명이었다. 부서에는 네 팀이 있었는데, 나와 다른 한 명은 각 팀에 혼자 배정 되었고, 다른 두 팀에는 두 명으로 배정되었다. ‘쓸쓸하겠구나~’ 했지만, 다들 금방 친해졌었다. 우리 팀에는 나만 인턴이고, 나머지 분들은 다 연구원 분들이셨다. 하지만,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모두 나를 항상 칭찬만 해주셨다. 너무 따뜻한 분위기였고, 연구원 분들이 대부분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셔서 퇴사하는 날도 참 기분이 묘했다.
따뜻한 분위기는 겨울임을 잊을 정도였다. 여러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팀에서 주관하는 연구 과제의 대대적인 회의가 있었다. 여러 기업, 여러 학교, 여러 연구소가 한 화상 회의에 참여했고, 회의 사유는 월말 보고(?)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우리 팀도 회의 참여를 위해 회의실에 모두 참여하셨고, 난 그 광경이 너무 멋있었다. 모두가 한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파트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하는 그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내가 다른 팀에 질문을 했었는데, 기특하다며 칭찬해주셨다. 또, 거의 마지막 내 업무 보고 때 일이었다. 보고를 드리고 나서 한 연구원 님과 자료 정리 중에 ‘연구원 님.. 이 부분은 제가 해결하고 가고 싶은데 끝내지 못 해서 아쉽습니다…’라고 했을 때, 연구원 님이 ‘허허~ 안 되는 것도 결과야. 우리한테 이렇게 힌트를 준 것만으로 충분해. 정 아쉬우면 여름에 와서 마저 해~’라고 하셨다.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그러나, 내가 수행한 업무는 내 기대와 아예 달랐다. 나는 딥러닝을 기대했었으나(지원 당시에도 그럴 줄 알았다..허허), 여러 프로그램들의 성능을 측정하는(?) 그런 업무였다. 자세히 말하는 건 조금 조심스럽다. AI를 시작하면서 줄곧 파이썬만 1년 정도 써온 시점이었는데, C, C++을 다시 건드려야 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고 빌드 해야 하는데, 그 기반이 C, C++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션에 정리하면서 공부를 했었고, 조금 흥미를 느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프로그램의 세세한 부분들을 신경 쓰면서 엔지니어링(?)이라 하는 맛을 봤기 때문이다. 이 때, Makefile, CMake 이런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성능을 측정해야 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파이썬으로 명령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구현해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둘 중 선택이었다. [새로운 걸 공부하면서 비효율 vs 새로운 걸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효율] 온전히 내 일이었다면, 전자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2달 동안 결과를 내야 하고, 팀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후자를 택했다. 웃프지만, 인턴을 하고 난 후에도 지금껏 C, C++을 볼 일은 없었다.
아무튼 인턴 얘기를 하다 보니 2월에 할 얘기까지 먼저 한 거 같은데,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물론, 내가 인턴이었기에 큰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업무들을 맡았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연구소의 어떤 좋은 팀에 있어 보면서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연구소 취업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퇴직 이후에 서류 처리 할 일이 있어서 팀의 책임연구원님과 주고 받았던 메일 중 기록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여기에도 적어두고 싶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텐데 아무쪼록 목표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훌륭한 공학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수학이 필요한가?
아주 도발적인 제목으로 새 글을 쓴다. 저 제목은 내가 작년까지 생각하고 다니던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왜냐하면,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거 같지는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모두 수학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저 생각들을 돌이켜 보고 과거에게 한 마디 하라 그런다면, ‘그래… 그렇게 살아봐…’ 할 거다. 저 당시에는 아는 게 많이 없어서 ‘행렬 곱만 알면 되는 거 같은데..? 역전파? 뭐.. Chain rule까지만 뭐…’라는 생각을 줄곧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너무 돌을 던지지는 마셔라.. 이 글을 당당하게 쓰고 있는 이유도 지금은 그 생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쩌다 내가 이걸 깨달았을까? 아픈 손가락 같은 졸업 작품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도 3학년 2학기부터 졸업 작품을 시작해서 4학년 1학기까지 하고 끝낸다. 즉, 내가 인턴을 간 시점은 졸업 작품을 하다가 중간에 가게 된 것이다. 3학년 2학기를 끝내기 거의 한 달 전, 여느 때처럼 졸업 작품 지도 교수님 미팅을 준비했다. (한 주에 한 번 미팅을 하는 방식) 우리 졸업 작품의 주제가 어떤 2가지 종류의 생체 신호를 다른 생체 신호로 변환하는 모델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력 신호가 2개이다 보니 난 멀티모달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미팅 날 교수님의 충격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이거 Diffusion을 해봐도 되겠는데요?'
AI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들은 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다. 생성을 하는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우수성과 더불어 악명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연구실 옆 자리 선배도 Diffusion을 하고 계셨기에 그 빽빽한 수식들을 얼핏 본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생성 모델은 대학원에 가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Diffusion을 안 하겠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때가 지금 시점에서 1년도 넘은 일이라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도전이라 생각했을 거고 어차피 먼 훗날 해야 할 일이었기에 빨리 접해본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 순간을 매우 칭찬한다.. 물론, 그걸 공부하는 건 고역이었지만.
그래서, Diffusion으로 해보겠다고 교수님께 말씀드리면서 조심스럽게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너무 어렵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남은 한 달과 방학 간에 제가 그걸 공부해와서 우리 프로젝트 목적에 맞게 구현까지 해오겠다.’ 도박이었다. 교수님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왜 조심스럽게 생각했냐면, 남은 학기 간 미팅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스스로 무례해 보여서 그랬다. 그런데, 이때는 알았을까? 내가 생성 모델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싶다고 말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아무튼 1월로 돌아와서 난 ETRI 인턴을 하고 있었다. 퇴근을 해도 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교수님께 큰 조건을 걸어두고,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팀장의 입장으로서 늘 어깨가 무거웠다. 프로젝트를 두 파트로 나누어 나머지 한 파트는 팀원들에게 맡겼다. 난 이미 공부해본 적 있는 것들이고, 팀원들이 그래도 얻어가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주에 한 번을 주기로 미팅하면서 내가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난 생성 모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DDPM 논문을 읽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 몇 번의 시도가 있고 나서 알게 된 건 VAE부터 공부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그럼 VAE는 쉬웠나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VAE를 이해하려고 논문을 보니 정녕 이게 생성 모델에 대한 논문은 맞는지,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혼란은 더 괴로웠다.
애초에 VAE를 제안한 논문은 Variational Inference의 방법을 새롭게 제안한 것인데, 이건 또 무엇인지, 이 논문이 나오기 전에는 어떤 것이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문제는 무엇인지, 한 줄 한 줄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이 당시에는 Variational Inference를 잘 모르다 보니 오히려 논문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면서 VAE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었고, 하루 종일 수식을 적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어려운 개념들로 뒤섞인 말들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왜 전개가 저렇게 되지? 저걸 썼다고? 저게 뭔데?’를 반복하며 거의 비슷하게 생긴 기호들로 끼워 맞추기에 바빴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여러 개념들을 습득했는데, 점차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빼곡히 채운 그 많던 수식의 종착지는 ‘정의’였다. 모든 전개는 정의에 의해서 정리가 되고 있었고, 그걸 멀리서 봤을 때 어떤 ‘문제’를 풀고 싶어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전개에는 이유가 따르고, 거꾸로 타고 올라가다 보면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그마한 파트를 모아 논문에서 말하는 문제점을 수식으로 정의하고, 내가 똑같이 따라 전개 할 때 주석으로 옆에 ‘이건 ~~때문에’라 주석을 달면서 정리했었다. 그리고, 맨 위에는 문제가 무엇인지, 맨 마지막에는 ‘~~되었기 때문에 맨 위에서 말한 문제를 해결함’ 이런 식으로 적었다.
이 당시에 수학의 중요성을 깨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일 겪게 되는 두통에 논문을 읽다가도 ‘아 뒷골 땡기겠다’하면 몇 분 이내로 빳빳해지는 뒷목에 익숙해지기만 했다. 비단 VAE를 이해하는 것으로 끝났었다면 좋았겠다만, 나는 Diffusion까지 이해하고 구현해서 가겠다 하지 않았던가. Diffusion을 이해하기 위한 수식은 VAE의 2~3배 정도였다. 빼곡한 수식을 보고서는 다 이해했으리라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봤을 때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는 그 괴로움을 느끼고,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은 수식 너머에 무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날에는 하루 이틀 정도만 본가에 다녀와 GPU가 있는 에트리에 출근했다. 어찌저찌 구현했던 DDPM이 잘 돌아가는지 빨리 보고 싶었었다. 연휴에는 정말 텅 비었었다. 내가 출근하던 연구실은 한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으며, 또 연휴라고 히터는 틀어지지도 않아 엄청 추웠다. (평소에는 매일 더울 정도로 히터를 틀어두기에 이 정도 추위는 예상하지 못 했다.) 한 번에 학습이 성공할 거라 생각 하지는 않아서 에트리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김밥과 마실 거리들을 사갔었다. 나의 코드와 고군분투 하던 순간들을 지나 학습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중간에 세이브된 가중치 파일들을 불러와 DDPM의 샘플링을 시도했다. 조금 더 극적인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 모든 time steps를 저장하여 한번에 영상으로 만드는 코드를 짜두고 샘플링 했다.

'와 뭐야.. 된다고? 된다… 되네…'
된다는 것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복잡한 수학과 수식들이 엄청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구나…
때가 되었다



대전에는 눈이 참 많이 왔었다. 어느 계절만 보여줄 수 있는 순간들 (봄은 벚꽃, 여름은 선선한 밤, 가을은 걸을 때마다 발에 걸치는 잎들), 이 순간들만 보면 ‘작년 이 맘 때는 뭐하고 있었더라, 내년에는 뭐하고 있으려나’하는 감상에 빠진다. 매일 발목까지 쌓이는 눈을 보면 매일 그 생각을 했었다.
‘내년에는 내가 울산에 없는데’
난 올해로 4학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 말은 이 인턴이 끝나면 울산으로 돌아가는 것도 마지막이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했다. 그 출발은 꽤 오랜 시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학교 출신은 아니었지만, 거의 학교 선배들보다 더 많이 조언을 해주던 누나가 연락이 왔다. ‘대학원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냐’, ‘벌써? 아직 연초야.’
혼났다.
수도권은 여러 학생들이 학부 연구생 신분으로 미리 몇 년 전부터 와서 자리를 꿰차고 있고, 전국에서 지원서를 넣는다. 인공지능을 한다면 대학원은 필수라는 이 미친 시대에 치열한 경쟁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난 아직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 간절하지 않았나? 아니.. 정확히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돌이켜보면, 막상 이 시기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오히려 긴장이 되어 아무 것도 못 했다. 내가 컨택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믿기 싫었었다.
연구실을 찾아봐도 무엇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람들마다 해주는 조언들도 정말 달랐다. 오로지 내 생각만으로 결정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모두의 기준을 다 고려해보려니 답은 안 나왔고,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 하나, 그것만 보인다면 바로 컨택을 해보자는 답을 내렸다.
그러다가 한 군데를 찾았다. 부담되는 마음으로 컨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CV도 처음 써보고, 찾은 연구실에 조금 fit하게 연구 계획서를 작성했다.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기 위해 연구실의 논문을 2편 정도 찾아 리뷰했었다.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면, 리뷰한 이유가 없는데.. 후… 다른 연구실 알아볼 때는 또 이렇게 해야 하려나’하는 마음으로 리뷰하고 정리해서 내 연구 계획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치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 연구실 진짜 가고 싶다. 여기가 내가 생각하는 한국 최고다.’라는 기대감이 커져만 갔다. 논문을 읽으면서 정말 끝까지 파고들어 끝내 증명해내는 그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큰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고,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노트북을 켜서 메일 임시 저장함에 저장해둔 내용과 파일들을 교수님께 전송했다.
2~3일, 메일은 읽으셨지만 아무 답장이 없었다. 이때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님들은 워낙 바쁘시다고 소문이 나있지 않은가. 우리가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이상으로 바쁘신 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기다렸다. 5~7일, 이때도 별 생각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면 리마인드 메일을 보내보는 게 좋다는 많은 조언에 메일 제목 앞에 [리마인드]를 붙여 다시 보냈다.
이때부터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왜 또 읽으셨는데, 답장이 없지’, ‘아.. 거절인가’, ‘그래도 답장은 해주시지 참…’, 그리고 이 때는 인턴을 거의 마무리 해가는 시기였다. 난 컨택이 될 줄 알았고(합격이 아니라도 연락을 의미), 된다면 직접 방문해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기에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끝까지 휴가를 안 쓰는 놈이었다. 하지만, 꼭 써야 된다고 하길래 다른 동기들보다 하루 일찍 퇴사해서 짐 싸고 울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첫 컨택의 실패가 주는 공허함에 옆 팀에 친해진 박사님은 위로를 건넸다. ‘난 애초에 너 거기 간다 할 때 어?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고!’ 박사님이 위로를 해주는 방법이었다. 허허.. 실패하면 어떤가, 고작 학교 한 군데가 거절 했을 뿐이다. 나의 슬픈 일을 알아주는 사람을 알게 된 것, 오히려 얻은 것들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리 슬프지도 않았다.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 듯하다 싶어 다른 학교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했었으니까.
이 당시 실패는 실패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반 년 정도 지나 8, 9월에 겪게 되는 그 거대한 폭풍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인턴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팀 내 마지막 미팅을 하고, 친해진 동기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팀과 마지막 미팅 이후, 회식했던 곳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얘기하라 하셨고, 나를 그곳에 데려가셨다. 고민하지 않고, ‘베스타’를 외쳤다. 뷔페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스테이크가.. 와 난 태어나서 그런 고기 처음 먹어봤었다. 아무튼 마지막 식사까지 마쳤다. 한 분 한 분 장비도 돌려드릴 겸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여름에 또 와!’라는 마지막 말들을 들으며 퇴사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하루 먼저 퇴사하는 건 이상했다. 아무튼 집에 돌아와 울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며 짐을 쌌다. 돌아가면 또 컨택을 해야한다는 걱정과 졸업 작품, 또 갈려나갈 학기가 싫었었다. 그래도 그보다 그리운 것들이 있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눈으로 씻고 갈 준비를 하려 했다. 밤 동안 쌓인 알림들을 지우려 폰의 스크롤을 내렸다. 또 프로모션 메일이구나~ 했지만,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컨택 답장 메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좋은 소식과 함께
2달 동안 울산에 없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2달, 60일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당연히 바뀔만한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바뀐 건 나 뿐이었다. 복학 이후에 계속 기숙사에 살아왔던 나는 4학년이라는 마지막 해를 나에게 집중해서 살아보고 싶었기에 자취를 시작했다. (대전에 있는 2달도 자취였지만) 그리고, 또 찾아온 변화는 울산에 오기 직전 받았던 메일에서 출발했다. 아, 어떻게 보면 찾아올 수도 있는 변화가 맞겠다.
답장을 볼 때마다 떨리는 마음이었고, 나는 여기에 어떻게 또 답장해야 할 지 긴장했다. 어떻게 말해야 호감으로 느끼실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서 나도 답장을 보냈다. 면담 일자를 잡은 이후에 나는 질문 To do 리스트를 만들었다. 꼭 물어봐야 할 것들, 물어보고 싶지만 눈치를 봐야 할 것들, 정말 호기심에 궁금한 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난 열정적이고, 자기 주도적입니다’를 어필할만한 말들을 준비했다.
면담 날이 되고, 고요한 자취 방에서 사부작 사부작거리며 나는 화상 면담 준비를 했다. 역광을 피하기 위해 껐던 불은 자취 방에 한껏 더 고요함을 불러왔다. 모니터에서는 긴장한 내 얼굴이 비추고 있었고, 그 오른쪽 아래 구석에 시간은 면접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안 들어오시지, 설마 까먹으신 건가, 아닌가 내 인터넷 문제인가, 어떡하지 메일을 급하게 써봐야 하나, 머리가 하얘지려 할 때 내 화면이 ‘로딩 중’으로 변했다.
매일 들어가던 연구실 사이트에서 사진으로만 뵙던 분을 보니 긴장과 동시에 ‘어 움직이신다’ 같은 멍청하고 무례한 생각을 했다. 정적으로 미동도 없는 사진만 보다가 움직이시는 걸 봤을 때 내 입장에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신비로움은 1초, 아니 0.1초도 가지 못 하고 난 긴장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면담과 동시에 내가 작성해서 보낸 서류들을 동시에 보시며 나에게 질문 하셨다. 그 순간들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물으시는 것마다 ‘그거 자신 있다! 관련해서 난 이렇게 접근해봤다!’ 계속 어필하려 했었다. 물론, 진짜 모르는 것들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큰 흐름이 넘어갔을까, 이제 나에게 궁금한 것들이 있는지 여쭈어보셨고, 난 뭔가 해야 할 거 같은 질문들만 골라 물어봤다. 그것도 끝이 났을까, 면담의 매듭을 지으시려는 듯 교수님은 ‘지방 사람이라 그랬는데, 사투리를 안 쓰네?’라 하셨다. 그건 그만큼 내가 긴장했음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긴장되는 자리(특히, 발표)라 느껴지면, 내 나름 빙의를 한다. 이 당시 꽂혔던 것은 ‘최성운의 사고실험’ 유튜브의 인터뷰어 최성운 PD님이었다. ‘난 지금 이 사람처럼 아주 부드럽고 침착한 인터뷰어가 되어 내가 흐름을 만들겠다’는 주문을 외우던 것을 교수님은 알아차리셨다.
방학 때 인턴을 할 수 있는지 여쭤봤다. 할 수는 있으나 그걸 권하거나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그 당시 난 고민이었다. 당연히 가야 하는데, 이미 방학 때 할 일들이 학기 초부터 정해져 있었고, 인턴을 딱히 반기지는 않으신다니. 가서 눈도장 한 번이라도 더 찍는 전략이 맞다 싶지만, 그래도 이미 할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은가. 내 나름의 의리 같은 걸 지키고 싶었다.
면담의 마지막이 되어서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입시 때가 되어서, 그때도 마음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그럼 리스트에 적어둘게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어리둥절했다. 후보에 올려둔다..? 아닌가 설마 좋은 시그널인가..? 해석이 어떻든 긍정의 의미 아닌가.
와.. 내가 여길..? 아냐 설레발 치지 말자. 아냐, 긍정의 의미잖아..!
하루 종일 희죽거리며 의지와 달리 올라간 입꼬리는 이미 김칫국을 한 사발, 아니 두 사발 벌컥벌컥 마신 놈처럼 굴었다.
제발 에고를 죽여
난 선배들에게 속았다. 4학년은 안 바쁘다 그랬는데. 복학한 이래로 제일 많이 밤새던 학기가 4학년 1학기었다. 그 범인은 졸업 작품, 방학 동안 모든 준비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실험, 그 무수히 많은 실험, 실패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는 그 실험… 온갖 부담을 느끼는 그 일을 위해 코드를 열심히 짰다. 하하, 코드만 짰다면 난 이렇게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주 미팅을 위한 PPT, 정말 싫었다. 미팅 준비 때문에 간혹 미팅 이전 수업들을 결석하기도 했었다. 밤은 제일 많이 세고, 결석도 제일 많이 했던.
그래서, 난 누군가 1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한다면, 그게 왜 기회냐며 욕을 퍼부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와 의욕을 상실한 프로젝트는 졸업 작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가장 많이 퍼부었던(빼앗겼던). 어떤 아이디어가 실패하면 하루 종일 좌절하고 있어야 했다. 그 실패를 헤쳐나갈 방법을 또 생각했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실험들을 또 다시 반복해야 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내가 그 실패로 반복해야 하는 모든 것들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그렇게 싫어했을까? 아니다. 실패는 잠깐 아쉬워하고 원인을 찾으면 된다. 그 또한 괴롭지만, 진짜 괴로운 이유는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대부분이 나의 의견으로 돌아가던 그 프로젝트에 실패 같은 것들이 보인다면, 막중한 부담감을 느꼈다. 내가 틀림으로 인해 팀원들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 민망함과 다음 주 지도 교수님 미팅을 생각하며 흘렸던 식은 땀이 이 프로젝트를 증오할 정도로 싫었다.
매주를 그렇게 살았다. 이때부터 예민함의 정도가 극에 달했다. 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지면 뒷목이 빳빳해지고, 머리에 모든 혈액 순환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걸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느꼈다. 나의 생각에 오차가 없게 만족하는 기준치도 더 높아졌다. 하지만, 이 기준치로 보는 눈을 통해 팀원들까지 보고 있었다. 팀원들에게 다그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러면 안 되지만 화도 많이 냈다. 매번 미팅을 마치면 ‘나 뭐 해야 돼’라고 묻는 그들이 너무 미웠다. 밤새고 미팅 직전까지 겨우 PPT를 만들어 교수님의 피드백으로 아득해진 정신에 그런 말을 들으면 다시 뒷골이 빳빳해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매번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나는 팀장이지 않았나,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해야 했고,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다시금 우리 목적이 뭔지 또 설명해줘야 했다. 하지만, 거의 1년 가까이 이러고 있으니 지쳤었다. 새로운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이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다른 관점이 필요했다.
“혼자 하는 프로젝트라 생각해봐” 누군가 해준 조언이었다. 팀원들을 무시하라는 어떠한 부정을 탄 그런 말이 절대 아니었다. 보통 다른 프로젝트도 혼자서 해오던 걸 보고 해주는 말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슨 차이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해결 방법이 없던 나는 그거라도 해보기로 했다. 일들이 부담스러워지지 않았다. 실패를 해도 원인을 찾으면 되는 거였고, 미팅은 내가 전달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정리하면 되는 거였다. 단순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단순함도 맞지만, 본질을 보려고 했던 거 같다.
책임에 가려져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 이때부터 이 생각이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종종 흔들리거나 부담을 느낄 때 그런 질문으로 나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본질이 무엇인가,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든 흔들림이 이 질문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질문의 반복을 통해 6월까지 수행했던 졸업 작품을 어찌 잘 끝낼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최우수상(2등)을 수상했다.
교훈도 없이 나에게 고됨만 줄 거 같던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나에게 있어 중요할 질문을 남겨주었다.
“본질이 무엇인가”

OMS 3: 나 뿐만이 아니야
“괌에 한 번 갔다 올래요?”
때는 종강 1~2달 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학부연구생 지도 교수님이셨다. 갑자기 괌이라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교수님은 학술 대회 얘기를 꺼내셨다. 학술 대회 준비를 해보라는 의미셨다. 예전에 연구실 대학원생 선배들이 간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나도 간다니? 추후 알게 된 바로는 교내 사업단에서 이번에 추진하는 프로그램이 괌 단기 연수 프로그램으로 내부 일정에 학술 대회 일정도 포함되었었다.
괌에 간다는 사실보다 학술 대회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학 생활 중 학술 대회는 일에서 벗어나 관심 있던 걸 새롭게 공부해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반대로 한 주제를 깊게 파고들어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작년 11월 학술 대회가 OMS 2였고, 다음 시리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시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해보면서 나의 부족한 식견을 넓히고, 과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challenging한 문제를 다루고 싶었기에 크게 2가지를 생각했다. 자연어 처리, 그래프 신경망 이 둘 중에 의료 도메인과 접점이 있는 문제를 다루어 투고하고 싶었다. 이 두 테마는 AI의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연어 처리는 LLM으로 말할 것도 없고, 그래프 신경망은 설명가능한 AI로 여러 논문의 Related works나 Future works에서 내 관심을 여러 번 이끈 바 있다.
고민을 하다가 그래프를 선택했다. 자연어 처리에서는 짧은 시간에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아직은 나의 연구가 어떤 기여를 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될 거 같아’가 자연어 처리에서는 없었다. 당시에는 ‘파인 튜닝 + a’ 정도의 접근만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OMS 시리즈의 기조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데이터 또한 고민이었다. 지금까지는 임상 데이터, 의료 영상, 생체 신호(ECG)를 다루어 본 바 있다. 하지만, 데이터 수준에서만 다루어봤다. 영상 처리, 신호 처리의 fundamental을 기반으로 접근해본 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허나, 생체 신호에서 ECG와 EEG는 신호라는 테마 안에 속해있을 뿐, 그 처리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OMS 3에서는 EEG와 그래프를 통해 도전해보기로 했다.
여기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는 건 글쓰는 걸 더 지루하게 만드는 거 같다. 준비하면서 느꼈던 건 그래프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는 정도, 특히 Spectral Graph Convolution은 최근 연말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공부했었다. 오히려 이번 OMS 3를 통해 강하게 느낀 것은 학술적인 것보다는 괌에 가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괌에 가게 되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친해지게 되었다.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던 다른 연구실의 학부연구생들, 수업에서 본 듯한 얼굴들, 처음 보지만 열정적인 친구들. 내가 4학년이라 대부분이 내 후배들이었다. 매일 연구실에만 있다 보니 나도 후배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정말 열정적인 친구들이었다.
난 가끔 학교에서 나의 열정으로 인한 외로움을 느끼고는 했었는데, 그 외로움은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후배들과 커뮤니케이션이 많아졌다. 괌을 같이 갔었던 후배들 뿐만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조금 더 자주 보이는 것 같았고, 나와 비슷해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배는 선배라고 대화를 나누다 후배들이 뜻하지 않아도 조언을 가끔 덧붙였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어찌 보면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리낌이 생겨 만나면 응원만 했다. 참 열정적이고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너무 반가움이라 해야 할까. 이들이 정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나와 비슷한 이들이 잘 되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나에게도 ‘그게 맞았구나’하며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해서 그렇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아무튼, 이번 OMS의 수확은 학술적인 것도 있었지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후배들, 모두 잘 되기를.
꿈은 이루어지나? (쉬어가며)
학부연구생으로 있던 연구실에서는 병원과 공동 연구로 진행하고 있는 AI 프로젝트들을 도맡아 왔다. 작년에는 A 병원, 올해는 B 병원이 메인이었다. (가끔 2개를 동시에 진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교수님께서 B병원은 차로 갈 수 있는 거리니까 병원에서 병원 측 교수님과 대면 미팅을 하자고 하셨다. 병원에 가서 하는 미팅인데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병원과 의료 AI 연구’라는 막중한 일이라는 것을 체감하지 못 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사실 크게 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논문 보고, 코드 보고, 코드 쓰고, 자료 만들고, 미팅하고, 논문 쓰고.
미팅 자료를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 병원에 방문했다. 드라마나 웹툰에서 보던 의국이라는 곳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병원 측 교수님은 내가 만든 자료, 실험 결과에 엄청 놀라신 듯 했다.
‘인공지능이 이런 변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건 저희가 진단할 때도 엄청 중요한 정보예요..!’
이때, 이상한 소용돌이가 쳤다. 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아.. 이런 일이었어… 맞아 내가 의료 AI 이래서 한다고 했어. 하지만, 이 당시 나는 공부를 계속 하던 입장으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의료 AI보다 더 본질적인 연구를 해야 이 세상에 더 유의미한 가치를 내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침 생성 모델로 수학에 눈 트기 시작한 시점이라 이론 쪽에도 흥미를 갖고 시작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병원 측 교수님의 말씀은 내가 AI를 시작할 때로 되돌려 놓았다. 그 때 내 꿈은 병원과 연구를 하는 것이었는데, 벌써 내가 그 꿈을 이루고 있었구나 하는… 뭉클한 감정을 돌아오는 길에 느꼈다. 그러니 지금의 꿈도 언젠가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꿈은 이루어진다.
실패를 배운 적이 없기에
괌을 갔다 온 건 종강을 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다녀와서도 종강을 했다고 느낄 새 없이 학기 초부터 계획된 일들을 해야 했다(병원 공동 연구 미팅 포함). 대학원 인턴을 마다하면서까지 해야 했던 건 졸업 작품의 연장선, 논문 작성이었다. 당시 7월이었는데 또 뒷골이 당겨오기 시작했다. 바로 논문을 쓰려니 허점들이 많았다. 내가 어떤 주장들을 하려니 그 근거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고, 이 연구만의 가치를 찾고자 논문을 쓰면서도 여러 실험들을 해서 교수님께 가져갔다.
‘교수님 작성 중 이런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 ‘이걸 이렇게 다뤄서 논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 ‘실험 결과, 뒷받침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 부분은 여기에 추가로 작성하겠습니다’ → ‘교수님 작성 중 이런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 ….
한 두 달 동안 이 굴레 빠져있었다. 실험은 실험대로 작성은 작성대로. 너무 지친 나머지, 시들시들해져 갈 때 본 영화 ‘F1 더 무비’를 발판 삼아 이 악물고 쥐어 짜내며 초안을 썼던 기억만 있더라. (이를 계기로 한동안 F1에 빠졌다. 페라리를 좋아했다.) 이 당시 overleaf 페이지와 figure를 만들려고 띄워둔 PPT에 대한 기억 밖에 없다. 그래서, 1년 동안 한 것과 맞먹는 수준으로 혼자서 한 달을 불태우며 초안까지 썼었다. (+ 물론 병원 공동 연구 미팅이라는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 7호관 중앙 복도에 걸린 우리 팀의 포스터의 연구 내용은 절반 채 되지 않는다.)
겨우 끝을 냈지만, 시기는 8월 중순… 대학원 입시를 위한 토익 걱정이 불현듯 떠올랐다. 학기 중에도 중간 중간 떠올랐지만, 눈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기 바빴다. 이때 조금 자괴감이 왔었다. 내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는 소홀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걱정은 학기 초 대학원 교수님과 면담 당시 긍정적인 반응이 혹여나 바뀌시지는 않으셨을지 걱정하게 만들었다.
마침 연구실에서 방학이라고 일주일 휴가를 주셨다. 휴가 전부터 계속 조금씩 공부하다가 토익에 내 휴가를 바쳤다.. 만족할 만한 점수는 아니었으나, 비벼볼 수는 있을 정도로 나왔다. 모든 것이 지쳐감에 피로는 누적되고 풀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그리고, 9월부터 입시를 시작하기 때문에 대학원 교수님께 다시 연락을 드렸다. 아직 나를 긍정적으로 봐주심에 변함이 없는지, 대학원 인턴도 마다하고, 그렇다고 따로 그에 대한 준비도 안 한 것 같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원하는 과나 트랙이 맞는지 여쭈어보면서 TO에 변함이 없는 지에 대한 질문을 메일로 보내드렸다. 며칠이 지나서 밤 11시 경에 답장이 왔다.
‘TO는 어떻게 되어있는데, 지원자가 상당히 많다. 그러니,’
‘다른 학교도 고려해보는 것이 좋겠다.’
실패했다. 컨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학교였는데 저렇게 답장이 왔다는 건, 실패를 암시했다. 너무 빳빳해지는 내 뒷골은 감당할 수도 없어 차라리 내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난 왜 그랬을까, 좀 더 준비를 했었어야지. 인턴을 갔었어야지.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았어야지. 나를 챙기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어야지. 너무 오만했어. 그래서 넌 실패했다고. 난 무너졌다. 아주 바닥까지 무너졌다. 온갖 좌절감은 이때 다 느꼈다.
3일 정도 정신이 나가있었다. 아빠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야 했었고, 아빠는 안타까워 하시는 듯 굉장히 슬퍼하셨다. ‘아들 놈이 열심히 했는데, 그랬다고 하니까 나도 슬프지..’ 너무 괴로웠다.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난 그 놈의 연구가 뭐라고,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을 증오해봤다.
아빠는 연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 그 사실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조금 더 넓게 보라 하셨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전부인 듯 살고 있던 게 몇 년이 되었는지, 그 방법조차 몰랐고 그러기도 싫었다. 해결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미 9월, 내년 후기를 노리거나 정말 급하게 컨택을 하든 해야 했다.
연초에 인턴을 할 때, 옆 팀에 친해진 박사님이 계셨다. 맨 처음에 2월에 컨택 하던 당시에 답장을 못 받고 있으니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정 없걸랑 나한테 말해. 아는 교수님이 있어. 너가 하고 싶은 게 너무 확고해 보여서 말은 못 해줬지만, 아는 분이 있어.’ 박사님 말씀대로 조금 다른 분야여서 그 당시도 너무 감사해 했지만,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못 간다 한들 내 방향성은 견고하게 지키고 싶었던 고집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어 박사님께 전화 드렸다. 하지만, 박사님과 통화로 몇 분 채 되지 않아서 내가 깨달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야…’ 깨달은 후에도 통화는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박사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너가 최고라 생각하는 연구실에 가면 너는 최고가 돼?’
‘아니요… 아무래도 저도 노력을 해야 하는 거지만, …. 음 어렵네요’
‘그럼 다른 연구실을 가면, 너는 최고가 될 수 없어?’
‘음 그것도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면, 지금 너 끝난 거 아니야. 너 젋어 임마, 한 학기 두 학기 차이가 뭐 그리 큰 차이도 아니고 …(중략)’
박사님 말은 곧이곧대로 다 맞았다. 내 앞길에 서서 몇 년을 더 앞장서 계신 분, 틀린 말이 없었다. 내가 좌절하고 있어야 할 이유도, 계속 무너져있기만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원하던 연구실이었던 만큼 난 그 연구실에서 출판된 논문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분야가 무엇인지 감도 잡지 않았는가.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휩쓸려 대학원 교수님께 답장 메일을 드렸다.
‘교수님 알려주신 대로 지원 하겠습니다. 다만, 혹시나 제가 떨어지게 된다 해도 너무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A 논문의 ~~~, B 논문의 ~~~ … 같은 접근 방법들은 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완전 동일하게 저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저런 톤의 메일을 보냈다. 그건 정말 내 진심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좋은 것들을 보자고 하는 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커다란 실패에 겪은 큰 좌절감은 나를 부숴버리기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내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지 않은가. 밑바닥에 가면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기에 난 또 한 번 일어나보자고 했다. 대신, 같은 실패를 돌이키지 않도록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게 말이다.
내 꿈은 최고의 연구자가 되기 이전에 평생의 연구자가 되기를 원한 것이었다. 이건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실패를 하더라도 나만 멈추지 않는다면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매일 상기한다면, 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매일매일 무엇이 본질인지 찾는 것이 나에겐 중요해졌다.
학부연구생을 하면서 교수님께 정말 많이 배웠지만, 단 하나 배우지 못 한 것, 그리고 이는 교수님조차 알려줄 수 없던 것이 이런 실패였다. 오직 나만이 문제에 맞닥뜨려야 배울 수 있는 이 실패로부터 난 중요한 것을 배웠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 하지 마라.
셀 수 없는 변수들이 서로 작용하여 결정되는 미래를 통제하려 드는 것은 감히 나의 능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함에 있어 슬퍼하고 있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면 하루 정도는 자신의 의지로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께서 하셨던 말 중 일부)
난 단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 다른 어떤 이가 와도 뺏어갈 수 없는 그 중요한 무언가를 늘 떠올리며 살아야 한다.
OMS 4: Doby will return with OMS 5…

시간이 흘러 또 학술 대회의 시즌이 다가왔다. 그렇다. 이건.. OMS 4다! 이전까지는 경험을 목적으로 다양한 기술들을 폭넓게 접해보자 했었다. 그 경험들을 통해 Medical AI에서 중요한 것은 Explainability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AI는 입력과 결과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던 것인지 알아야 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올라가고, 의료 분야같이 진단이나 추론 결과에 타당한 rationale이 필요한 분야에는 이 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생성 모델에 입문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theorical한 approach들을 접하면서, 이에 기반한 연구들을 하고 싶었었다. 그 교집합에 있던 것이 폭넓게 보면 Representation learning이었고,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Disentangled representation learning이었다. Disentangled representation learning은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해당 연구실의 논문들을 보고 알게 된 기술이었다. 그래서, 감사하게 여겼던 것이다.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힌트를 얻었으니까.
마지막 OMS 시리즈가 될 것이란 직감과 함께 이번엔 다른 motivation으로 접근해보고자 했다. OMS 시리즈는 마지막이지만, 앞으로 깊이 파고들 내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신호탄으로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임했었다.
Disentangled representation learning의 기반은 VAE를 통한 접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Diffusion model에서도 이런 finding이 되어, Diffusion-based DRL 접근도 있다.) VAE를 거의 반년동안 갈고 닦은 나에게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method를 금방 고안해냈다.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variational inference와 관련된 수학적인 부분에서 abuse of notation이 있는지 깊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approach 수준의 프로젝트로 끝내고자 했었다.
이것도 정말 바쁜 시기에 했던 프로젝트였던 거 같은데, 하는 중에는 정말 재밌는 프로젝트였다. 난 항상 포스터를 만들 때에도 진심을 다해서 만들었었다. 아무리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없더라도 항상 우측 상단에는 QR 코드를 삽입해 내 깃허브 프로젝트와 연결이 되게 했고, 내가 있는 세션 중 내 포스터가 제일 impressive했으면 했다.
발표 날이 되어 내가 참여하는 세션에서 좌장님이 내 발표를 들으시더니 QR 코드를 찍어보셨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진짜로 내 프로젝트 페이지 QR코드를 찍어 들어가 보시는 건 말이다. 뿌듯했다. 누가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라면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이 맞다는 것을 상기했다. 언젠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은 누군가 나타나게 될 것이니까.
시간이 흘러 내가 우수논문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학부 졸업 전에 국내 학회에서 상 한 번 타보고 싶은 것이었는데,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이 버킷리스트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OMS 시리즈의 마지막을 축하하기도, 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기도 하는 그런 수상이었다.
OMS는 지난 2년 간 나를 성장하게 한 프로젝트 시리즈다. 불안에서 꺼내기도, 더 폭넓은 경험을 시켜주기도, 새로운 출발점을 알려주기도 한 이 시리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다. 학부 시절 동안 가장 잘한 일을 뽑으라면, 우선 이 OMS 시리즈를 후보에 올려두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마지막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지막이라 직감한 이유는 한동안은 새로운 자리를 잡아감에 있어 집중을 해야 하고, 이제 더 이상은 학부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더 높은 수준에 걸맞는 프로젝트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은 아니고 페이즈 1 종료다. OMS 1, 2, 3, 4를 포함한 이 페이즈 1을 끝내고, 몇 년 뒤에 OMS 5로 돌아온다. 정말 멋진 프로젝트로 말이다.
Doby will return with OMS 5…

반드시 너를 이긴다
그 실패를 겪고 다시 일어서는 나는 다시 기회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장 내년 전기를 위해 급하게 컨택하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내년 후기를 생각해서 다른 학교들도 리스트업해서 컨택했었다. 예상한대로 내년 전기를 위한 컨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내년 후기를 위해 인턴 자리를 찾아보고 있다고 컨택을 넣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학교에서 가까웠던 곳이었기 때문에 짧은 면담이라 하더라도 내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했다. 이건 아는 형님이 해준 조언이었다. ‘XX아, 그건 당연한 거야.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랑 화상으로 얘기하는 거랑 뭐가 더 와닿겠냐’, ‘대면이요..?’, ‘그래 이놈아, 그럼 가서 해야지~’
그리고, 메일로 이미 보냈던 서류도 출력해서 가져갔다. 이것도 형님이 해준 조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을 보면서 이런 곳에 학교가 있을까 했다. 그러다가 도착해서 본 학교의 전경은 나를 압도시켰다. 그 좁은 시골길을 통과하고 펼쳐진 풍경은 판교에 스타트업이 모여있기라도 한 듯이 굉장히 현대적이었다.
면담 시간을 기다리면서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모여 discussion을 한다거나, 실험 장비로 보이는 물건을 가지고 이것저것 뚝딱뚝딱하고 있는 것을 봤다. 오밀조밀한 공간들 틈에 형형색색의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이런 곳 오고 싶다’는 걸 느꼈다. 한 10분을 남기고서 교수님 오피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XX 학생?’
교수님이었다. 긴장 안 하기로 했는데, 그게 마음 먹는 대로 될 리가. 면담을 시작했다. 출력한 서류들을 건네면서, 전 이런 사람입니다를 말하기 위해 ‘교수님, 제 소개를 먼저 간단히 드리자면요…’로 시작해서, 열정이 아주 큰 사람임을 어필했다. 입학 예정 시기, 졸업 예정 시기, 연구실 내 진행되고 있는 연구, 정규 미팅 스케줄 이런 대화들을 나누고, 또 궁금한 게 있는지 여쭈어보셨다. 마침 내가 공부하고 있던 어떤 논문에 대해 궁금한 게 있었고, 교수님께서 이에 대해 발표하신 영상을 본 적이 있어서 관련 질문을 내가 가져갔었다.
모든 면담을 마치고서야 교수님은 내가 좋은 인상을 주셨다고 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인턴을 하기 위해 이 연구실에서는 논문 발표 테스트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알고 있었고, 면담이 끝난 후에 메일로 논문을 보내줄테니 일주일 간 준비해보라 하셨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 일어나 나오면서 ‘교수님, 저 VAE 하나만큼은 엄청 자신있습니다!’하고 나왔다. 교수님은 오피스에서 나와 1층까지 나를 바래다 주셨다. 가는 길에 교수님은 여쭤보셨다.
‘XX 학생은 왜 교수가 되고 싶어요?’
‘아무래도 평생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생 연구를 하는 것이 제 꿈인지라..’
‘저도 학생 때 교수가 꿈이었는데,’
….
‘아무튼 반가웠습니다. 논문은 바로 메일로 보내드리죠.’
‘넵, 교수님 들어가십쇼!’
교수님은 악수를 건네셨다. 나는 땀이 흥건해진 내 손을 건네는 게 부끄러웠으나, 교수님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교수님의 메일에 회신이 왔다. 논문 pdf 파일과 같이 왔었는데, 학교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봤었다. 50 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이었다. 당황했다. 너무 자신감이 있다고 어필했었나. 그렇다 한들, 당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난 이걸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었으니까.
모든 걸 걸고 읽어야 했다. 새로운 생성 모델을 정의한 논문이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생성 모델의 확장도 아니어서 여기서 설명하는 어떤 이론들을 알아야 했다. 다행히 정보 이론이 큰 기반이 되는 논문이라 생각했다. 정보 이론 과목을 수강 했던 나는 어느 정도의 직관을 가진 채 이 논문을 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수학의 이론들이 이 논문을 뒤엎고 있었다.
또 심지어 영어로 발표였다. 슬라이드에 스크립트를 적어서라도 했어야 했다. 일주일을 준비하는 동안 3번 정도 밤을 샜다. 내가 올해 읽었던 논문들 중 가장 어려웠으니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읽고 싶은 논문들만 골라 읽었지 않은가. 읽고 싶은 논문들이었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논문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습도 필요했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연구일지라도 금방 적응 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필요했다.
전날마저 밤을 새고, 발표 직전까지 슬라이드를 수정하고 있었다. 꼬질꼬질해진 상태로 zoom에 들어갔다. 대략 3-40분 간 발표를 진행하다가 교수님께서 중후반부 쯤에 멈추셨다. 아, 너무 많이 준비했나. 줄이는 것도 능력인데 그러질 못 했나 했지만, 자책할 틈도 없이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어야 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국어로 허용하셨고, 질문들에 대해 차근차근 대답했다. 하지만, 명쾌한 답은 아니었는지, 약간의 정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교수님의 표정을 보진 못 했다. 화면 공유를 한 순간부터 긴장해서 아무런 물리적인 행동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인턴 오시면 되겠는데요.’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당히 감흥 없어 보이는 대답 같아 보이지만, 긴장해서 툭툭 튀어나왔을 뿐이다. 속으로는 ‘아… 됐다.. 됐어.. 하…’ 그제서야 숨이 쉬어지고, 몸에 혈류가 도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일정이나 기숙사 이런 것들을 공유하고 논문 리뷰 테스트를 마쳤다. 실패에 무너진 나는 금방 일어나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그제서야 한 시름을 놓고서 샤워를 했다. 머리까지 말리니 눈이 감기고 있었다. 오후 4시 쯤에 나는 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주에는 대학원 면접 일정이 잡혀있었다. 컨택에 실패했던 그 대학원이 맞다. ‘떨어졌는데 면접은 왜?’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패라는 답변을 받던 메일을 주고 받던 당시에 지원 관련 궁금한 게 있어서 관련 질문도 메일에 써서 보냈었다. 그 때, 내가 답변하기로 ‘아, 그럼 잘 준비해서 ~~로 지원하겠습니다’라고 했었다. 그 말 하나 때문에 지원은 해야겠구나.. 했다. 뭐 어차피 대학원 면접은 내년에도 한 번 봐야 하는 것이니까. 경험 차원에서 한 번 가보지 뭐 했었다. 논문 리뷰 테스트 3~4일 이후였기 때문에 준비도 잘 못 했고, 전날 저녁에 올라가서 숙소 잡고 밤새서 준비했었다.
참 오랜만에 서울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지막으로 서울 간 것도 1년이 훌쩍 넘었던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서울에 올 일도 없었으니까. 아침 8시에 버스를 타고 그 대학교 앞에 내렸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내가 거의 1년 간 오고 싶기를 원했던 학교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정말 컸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하하. 뭐 인턴도 붙었겠다. 우울할 필요는 없었다.
면접 대기 장소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폰 사용 금지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면접 준비를 노션으로 하고, 대기하면서 폰으로 보려고 했었다. 크게 당황은 하지 않았다. 그럼 뭐 내가 할 거 해야지… 하고 수식이나 필기를 해두던 노트를 펼쳤다. 시간도 안 가고 해서 당시 궁금했던 Normalizing flow의 Change of variable 증명을 이해하려고 했었다. 옆 사람은 아마 당황하셨던 거 같다. 다들 프린트로 뽑아온 자기소개서를 읽고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수식 전개나 하고 있으니. 음.. 미안합니다. 밤도 샜던 터라 머리가 텅 비었었거든요.. 하하..
면접도 무언가 무난무난하게 흘러갔다. 별 미련이 없던 터라 아는 건 신나서 설명하고 있으면 면접관이 내 말을 끊었고, 모르는 건 이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고 했다. 나보다는 옆 사람들이 정말 벌벌 떨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하, 난 긴장 안 해도 되는데 부럽지~’ 웃픈 혼자만의 생각을 했다.
면접이 끝나고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던 누나를 만났다. 그 누나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였다. 컨택 준비하던 당시 또 조언을 해주었는데, ‘엥 설마 너 이 학교 지원하니’, ‘뭐야 누나가 어떻게 알아’ 하면서 그때 이 학교에 있다는 걸 알았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 어떻게 살았는지 회포를 풀다 보니 저녁이 되어 난 울산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혼자 서울역 앞에 서서 늘 서울에 올 때면 가장 처음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경은 항상 낮이었지만, 이번엔 밤이었다. 한창 서울에 올라가고 내려와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항상 울산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이 곳에 내 꿈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또 돌아가 혼자가 되기 싫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는 올라가고 내려올 때마다 그 사람들에게 ‘대학원을 무조건 서울로 올게, 그러니 나 잊지 말고 있어. 그때 자주 보자고!’ 했지만, 그 약속은 못 지켰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서울은 애증의 도시다. 나의 꿈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지만, 서울은 나를 뿌리쳐냈다. 여기에 너가 있을 곳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 많은 사람들, 높게 들어선 건물들, 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가득히 반짝 반짝 채워내는 불빛들, 그 많은 것들을 품어내고 있는 이 서울에 나라는 단 한 사람은 들어갈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사실에 난 이 서울이 밉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도시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 만나러 가끔 와야지 했지만, 난 오게 되더라도 ‘이방인’인 것이다.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다음 주가 되었나. 수업 중에 메일이 한 통 왔다. 메일 제목이 길어 끝 부분이 잘렸었는데, 내가 컨택한 곳 중에서 답변이 왔나 싶었다. ‘[26년 전기 입학] ….’ 전기 입학이라면,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나에게 실패라는 큰 좌절감과 서울이라는 애증의 도시를 오랜만에 보여준 그 학교였다. 여기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지라 수업 중에 궁금해서 들어가서 확인했다.
‘교수님께서 연구실에서 연구 활동을 미리 시작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중략)’
‘잘못 왔나..?’
근데, 암만 봐도 맞았다. 붙은 거였다고..? 2~3달 전 내가 겪은 그 실패와 좌절감이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싶어서 메일을 주고 받다 해당 연구실의 연구원 분과 화상 면담 일정을 잡았다. 면담까지 마친 후에야 알았다.
‘합격이다’
그런데, 기쁘지 않았다. 내가 1년 간 바래왔던 연구실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심각해졌다. 고민에 빠졌다. 선택을 해야 했고, 또 바래왔던 연구실을 간다는 것이 내 생각처럼 이상적이지 않았다. 내 연구 주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고, 그건 내가 지향하는 바와 거리가 있었다. (대학원을 진학할 때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너무 비판은 마셔라.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합격하고 나서야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학비가 꽤 큰 부담이 되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컨택 당시에는 전혀 신경도 안 썼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합격을 했다면 이제는 고민할 게 그런 것이었다. 1년 동안 원했던 연구실이었지만, 인턴을 붙은 학교와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한다는 게 조금 의아하긴 할 것이다. 인턴을 붙은 곳은 입학 확정도 아닌데 왜 고민하고 있는지 말이다.
일단 내가 원하는 연구 분야를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곳이었고, 학비가 없는 학교였다. 그래서, 붙은 학교에 간다면 나는 학위 과정 동안 항상 돈 걱정을 해야 했다. 연구 생각만 해도 벅찰 것인데, 돈까지 신경 쓰라 한다면 미친 짓이었다. 또, 그건 불효라 생각했다. 대학원은 오로지 내 선택으로 가는 곳 아닌가. 그런데, 왜 내 가족이 힘들어야 하는가. 고민조차 안 하고 그 학교로 간다면 난 스스로에게 인간으로서 실망할 거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빨리 끝내고 싶었다. 오히려 심각한 문제일 수록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요일과 주말 안에 고민 끝내서 둘 중 한 곳에 메일을 쓸 생각이었다. 내 결정을 위해 고려할 것들은 비단 이런 문제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난 서울이 애증의 도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고, 어렸을 때부터 그곳은 음악을 할 때도 꿈의 도시였다. 그런 곳을 마다하는 건 또 스스로 혼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난 내 감각이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인턴을 붙은 학교였다. 미친 짓이었다. 붙은 학교도 아닌데 굳이 또 리스크를 감수하고, 혼자가 되길 자처했다. 뭐가 되었든, 넘버원은 내 연구를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턴을 붙은 학교였다. 외롭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학위 과정 중에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는 싫었다.
미련 없이 이런 결정을 빠르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문장 때문이었다.
‘최고의 선택은 나의 노력에 달려있다’
두 가지 이상의 기로에 섰을 때, 난 항상 크게 고민하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항상 내가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 달렸었다. 최고의 선택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없다. 선택을 하고 난 후에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할 수 있는 지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뻔했다. 월요일 아침 난 정중히 거절 메일을 써서 보냈다.
미친놈 맞다. 지금 봐도 그렇다. 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후회가 없게 하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인턴으로 가는 학교에 합격은 물론이고, 가서 좋은 논문까지 써야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니, 난 여기에 내 모든 걸 건다.
물론, 그 학교의 합격증이 나왔을 때는 기분이 정말 심란했다. 평행세계의 나는 이 합격증을 보고서는 그 학교에 갈 것이다. 난 그 놈을 이기려고 목숨을 걸 것이다.
반드시 너를 이긴다.
한동안은 나와 나 사이에 경쟁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욕심 많은 스페셜리스트
1년 동안 할 일들을 거의 다 마친 시점이었다. 내년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이제는 결정이 났으며, 한동안은 내일을 걱정 할 필요 없었다. 병원과 공동 연구도 내가 할 것까지 마무리를 지어가는 단계였고, 조금의 여유가 생겼었다. 하지만, 본성 자체가 여유를 갖지는 않는 그런… 피곤하게 사는 성격 아닌가. 난 또 새로운 것들을 계획했다.
앞으로 대학원에 가면 난 한 개 내지는 두 개 정도의 분야를 지독하게 몇 년 동안 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fundamental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수학에 관한 fundamental보다는 AI가 발전하면서 큰 마일스톤처럼 남겨둔 저명한 연구들 있지 않은가. 그 논문들을 읽고 구현해보면서 내 스팩트럼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만은 알아두고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반년 간은 인턴 신분이지만) 그래서, 내가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저명한 연구들을 리스트업했다.
Normalizing Flow, GAN, Graph(Spectral), Neural ODE
이곳을 떠나기 한 달 반 정도 남은 시점에서 이들을 파기 시작했다. 각각 1주 반 내지는 2주 안으로 끝냈어야 했다. Normalizing Flow는 상당히 재미있는 논문이었다. Disentangled Representation Learning을 공부하면서 VAE가 갖는 latent space의 특징을 알고 있던 나는 이 논문에서 말하는 latent space의 한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를 Change of Variable을 적용해서 Variational inference를 상당히 고도화하는 연구였다. 구현하는 부분에서 실수가 많아 꽤 고생했지만, 여러 시행착오 끝내 실수를 알고 내 지식을 확장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혔다.
GAN은 인턴으로 가는 연구실이 main은 생성 모델이라 이걸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논문 리뷰를 하고, 논문에서 말하는 loss saturation이 왜 일어나는지 그에 대한 대응 strategy는 왜 효과적일 수 있었는지, Mode collaspe가 무엇인지 알게 되며 또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리고, Graph (Spectral)는 OMS 3에서 완전히 이해하지 않은 아쉬움과 아직 탐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라는 생각에 공부하게 되었다. 꽤 어려웠다. Laplacian matrix의 Eigenvalue가 0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왜 Laplacian matrix를 갖고 linear transform을 하는 게 왜 graph signal의 Fourier transform이라 볼 수 있는지, Polynomial parameterization을 하면 결국 spatial GNN이랑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이 차이가 무엇인지, 꽤 수학적으로 애먹었던 시도였다. 이걸 이해하려고 Signal processing까지 공부했었는데 (기초적인 부분), 이 때 이를 공부한 것도 그래도 스펙트럼의 확장이라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polynomial parameterization을 하면서 spatial GNN과 큰 차이점을 못 느꼈던 나는 큰 흥미를 못 느낀 채 마무리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다.) 지금의 생각은 spatial GNN을 이론적으로 타당하게 만든 method? 이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Polynomial paramterization이 들어가면서 K-hop을 고려하게 된 시점부터 비슷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관련 논문이 있나 찾아봤는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논문이 있는 거 같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당시 Graph는 따로 구현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Neural ODE,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분 방정식부터 공부를 했어야 했다. 미분 방정식을 수치적으로 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변수 분리법은 무엇인지,… 하지만, 논문은 논문 자체로 엄청 어려웠다. (Appendix를 2번 Section 초기에 달았더라면.. 아직도 부글 부글 끓어 오른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직관이 생기고, (‘adjoint state를 ODE Solver로 풀면서 Backpropagation 하면서 메모리 이슈를 해결한다’이런 직관?) 그 뒤로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수월(?)했지만, 구현은 또 구현대로 어려웠다. 난 PyTorch로 모델링하면서 forward만 신경 써봤지, backward는 신경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autograd가 Backward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직관은 이미 몇 년 전에 만들어 놓은 바 있었다. 이 글(링크)은 PyTorch를 시작하면서 이게 Backpropagation을 어떻게 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글이었다. 2년 전에는 질문하고 있는 스스로도 쓸모없는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쓸모 없어도 궁금했었다. 그리고, 세상에 쓸모없는 질문은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뭐… 여기까지 한 달 반 동안 한 것들이고, 굉장히 간단하게 요약했다. Graph랑 Neural ODE는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정말 정말 고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다. 내 fundamental을 구축하려고 한 목적이 있었지만, ‘난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라는 질문을 뱉게 했다. 그러자 얼마 전 교수님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내 생각에 난 제너럴리스트인데, XX이 너는 스페셜리스트거든.’
교수님의 말씀이 맞다. 하나 궁금한 게 생기면 죽자고 그거만 파지 않았는가. 너무 좋은 장점이라 볼 수 있지만, 이건 내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하는 내 양날의 검이다. 장점인데 왜 그러냐는 의문이 드시겠지만, 정말 괴로울 때가 있기도 하다. 질문이 생기면, 비단 뒷골이 땡기는 두통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한 달 반은 이 성격에 맞지 않는 플랜이었다. 왜냐하면, 그 플랜은 스페셜리스트가 제너럴리스트를 흉내내는 애초에 타고나길 맞지 않는 욕심 가득한 플랜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것들의 반복이었고, ‘이거 왜 이렇게 되지’라는 의문은 하루에 수십 번씩 쏟아졌다. 그걸 반복하면 정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숲을 못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 논문이 뭘 하고 싶은 거였더라 하는 그런 원점을 벗어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었고, 정리가 안 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제일 많이 검색해봤던 것도 ‘논문을 읽는 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지, brief하게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모르는 게 나오면 넘어가라니, 어떻게 하는 건지 싶었다. 그럼 그 뒤에 내용이 이해가 안 될텐데… 하는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어떤 교훈들을 얻었다. 일단 한 가지를 깊게 파자고. 인턴으로 가게 될 연구실에서 정해지게 될 연구 주제만 깊게 파보자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면 나머지는 따라올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서 말이다. 그리고, 단 하나를 생각하더라도, 이를테면 한 논문만 보더라도 여러 개념과 이론들을 다룬다. 이럴 때는 내가 어떻게 집중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몰입하는지 이런 것들은 앞으로 내가 수련해야 할 것들이었다.
즉, 아직 내가 갈고 닦아나가야 할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이를 연구라 한다면, 내가 연구를 수행하는 태도, 지식을 더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걸 수행하고자 할 때 정말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문을 읽을 때 필요한 것들만 뽑을 수 있는 능력, 한 눈에 딱 들어오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 등 무수히도 많다.
하지만, 이런 능력들은 기르고자 한다면, 잘 안 길러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 하고, 양극을 찍어보면서 어떤 중간 점을 찾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 당장 내가 단 하나를 풀겠다면 어떤 것을 풀 것인지 늘 떠올려야 한다. 그 어떤 노이즈를 제쳐두고 말이다.
단 하나, 내가 풀고 싶은 문제.
나를 계속 다듬어가는 수련을 해야 했다.
이별을 기다리며

12월이 되어서도 이전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때문에 마음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전과 달랐던 유일한 하나는 ‘마지막’이라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인해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이었다. 학교에 있는 지난 2년 반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해왔다 보니, 이 많은 것들을 하더라도 또 할 것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구글 캘린더를 여러 항목에 나눠서 할 일 목록들을 만들어두는 편인데, 가장 구석에 있는 항목의 이름이 ‘Broad’다. 세부적으로 작업들을 적어두기 보다는 크게 봤을 때 할 일들을 정리해두는 목록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목록에 할 일들이 1~2개 밖에 없을 때,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만나게 되는 사람들마다 괜히 슬퍼지고는 했다. 오죽하면 후배도 ‘형 그만해요’라 농담 할 정도로 ‘우리 이제 마지막일까?’라는 투정을 줄곧 했다. 참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별이다. 연구실에서는 오히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늘 티가 나는지 선배들은 장난을 치셨다. ‘XX이 거기 가서는 잘 하고!’ 그럴 때마다 그러지 말라며 웃어넘겼지만, 농담으로 그런 얘기를 들을 때도 참 슬펐다. 이 농담조차 진짜 마지막 말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어서 그랬다.
교수님과 마지막 미팅을 했다. 모든 데이터와 모든 모델링에 대한 실험을 마치고, 실험에 대한 결과 해석까지 나름대로 하면서 ‘후임자가 오면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으로 이후 계획까지 미팅 내용으로 준비했었다. 내가 마지막을 준비 했었던 것처럼 미팅을 마치고 난 후에 교수님도 마지막을 준비하셨던 거 같았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지금까지 여기에 있어줘서 고마웠다며… 우리 교수님은 항상 칭찬으로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교수님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셨는데, 난 교수님에게 좋은 학생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럴 때도 있었겠지만, 늘 그러지는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이 연구실을 떠나더라도 교수님께 좋은 학생이 되는 법은 있다. 이 연구실 출신으로서 멋진 사람이 되는 거다. 교수님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내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예견된 이별을 기다리면서 시간들을 보내는 게 참 싱숭생숭하다. 동기 형도 ‘영원한 이별이겠냐, 종종 연락하면 되지’라 말했지만, 본인도 사실 기분 이상하다고 덧붙였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기분이 멈추지 않는 것 때문에 이게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생각해본다.
내 미래를 결정적으로 정해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난 대학원에 갈 거고, 산골짜기에 있고, 그러니 사람들을 만나기는 힘들 거고, 박사까지 할 거고, 그러니 연애도 몇 년 간 힘들 거고, 결혼을 못 할 수도 있고, 그러니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고, …’ 꼭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걸 아는데, 그럴 것 같다는 시덥잖은 생각들을 했다.
연구실 선배는 이런 얘기를 듣더니 정해두지 말란 말을 했다. 이유는 단순히 모르니까. 그런데,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모른다 내 미래는. 갑자기 1~2년 차가 되어서 ‘연구가 내 길이 아닌가?’ 하고 길을 꺾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선배가 하신 얘기는 그런 얘기는 아니었다. 미래의 인간 관계를 그렇게 정해둔다는 건, 오히려 내가 막아서는 게 되어버린다는 거지. 상황이 그렇게 될 수는 있어도, 그 상황 때문에 미리 그러지는 말라는 거였다.
정말 내가 그들이 그리워지면 연락을 해서 주말에 만나자고 할 수도 있는 일들이었다. 그게 정녕 아주 먼 서울일지라도. 예견된 이별 때문에 외로움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또 새로운 인연들이 있을 것이고, 간혹 우리들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서로에게 남기는 말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예견된 이별에 씁쓸하고 슬픈 마음에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에게 한 마디만 남겨두고 싶다.
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제 블로그까지 찾아와서 이 긴 글을 읽어주시는 분이라면, 제가 참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 겁니다. 저도 그대들을 잊지 않고 가끔 연락드리고 잘 지낸다는 안부를 전할 것이니, 꼭 잘 지내고 건강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서투르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탓에, 참 사람이 독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게 살 수는 없더군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저는 한 번이라도 기댔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줘서. 그러니까 그대도 힘든 순간에 직면했다면, 너무 혼자가 되진 말아주세요. 저에게 연락주세요. 저도 당신에게 한 번쯤은 기댔지 않습니까. 제가 응원하고 있습니다 하하! (저도 너무 힘들면 또 기댈 거니까요)
아무튼 너무 정해두지 말자는 게 결론이었다. 참 애석하게 이에 대한 해결 방법도 비슷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이.
그래도, 잊혀진다는 건 조금 두렵지만 오늘을 살아가야 했다.
글을 마치며
여기까지가 저의 2025년 한 해였습니다. 어떠셨나요. 너무 적나라하게 저의 얘기를 한 거 같아 조금 걱정되는 마음으로 쓰긴 했습니다. 무언가 특정되면 안 될 거 같은 이야기들은 아쉽지만 접어두고 기억 속에서만 간직하려구요. 제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유는 딱히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물론, 성취라는 목표도 가끔은 동기부여가 됩니다만. 그것보다는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삶을 바랬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요.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 즐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즐기려면 그것들을 잘 해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잘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잘한다고 하는 것들은 딱히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실패도 많이 하기도 하고, 너무 큰 욕심은 저에게 큰 화를 불러일으켰어요. 그래서,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도출하기 위해 지난 몇 년 간 방황을 많이 한 듯 합니다. 저의 꿈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 소중한 것들을 3가지 정도 얘기해보라 한다면, 첫 번째는 평생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어딘가에 집중하고 몰입해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모든 걱정들을 뒤로 한채 오직 하나의 질문을 두고 고민하는 저의 모습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글의 시작에서 말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답을 찾은 거 같아요. 너무 당연했어요. 저는 그냥 이 일을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넘어지고 일어나는 건 어떤 성공과 같은 야망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어요.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일어나서 걷고 있어야 하거든요. 후배들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찬란하지를요. 수없이 실패하고 넘어져도 나아가려는 그 모습들이 정말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세계 최고가 한 번 되어보고 싶어요. 여기서 말하는 세계 최고라는 건 어떤 대가가 되고 싶다를 의미하진 않아요. 탑 컨퍼런스를 내보고 싶어요. 물론, 그게 세계 최고임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Accept이 되고 나서 '해냈다'를 느끼는 그 10초 동안은 저 혼자라도 그렇게 생각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세계 최고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탑 컨퍼런스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떤 그 지점이 있을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연구자는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뭔가 있어요. 비단 실적 뿐만이 아니라 상상이 되는 무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번째 꿈은 절대 절대 첫 번째 꿈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전 그저 연구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걸 지켜내는 게 제일 먼저예요.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저는 매일 제 자신과 싸울 겁니다.
세 번째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제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너무 외로움을 타기도 합니다. 가끔은 연구가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쁘다면서 밀어내야 하는 이 순간들이 너무 싫기도 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 순간들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그러니 그런 부분들은 제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거 같아요. 올해가 대학생활도 마지막이라 11월 말부터 한달 내내 조금 쳐져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들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그랬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면 영원한 이별도 없겠죠. 제가 자주 연락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학교로부터, 가려고 했던 서울로부터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조금 더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고 싶어할 거 같아요. 그러니 항상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가끔은 저를 찾아주세요. 아마 제가 많이 반가워 할 겁니다.
항상 회고록의 메인은 아웃트로였습니다. 끝말은 항상 스스로에 대한 응원으로 내년을 기약하고는 했었죠. 이번에도 이변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복학을 하고나서 2년 반 동안 스스로를 증명해왔습니다. '2년 반 전 대학원을 갈 수 있기나 할까'하던 걱정 많은 23살은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하며 원하는 곳까지 붙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힘을 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더 본질을 봐야 하죠.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로요. 제가 할 수 있었던 증명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매일 매일 성실하게. 인생에 맘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없을 거고요. 예전에 '하루 하루 성실히, 인생은 되는대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위로받기도 했지만, 곧 그 말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거 같았거든요. 하지만, 생각보다 저는 나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맘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거 같아요.
이 세상 누가 와도 절대 가져가지 못 하는 저의 첫 번째 꿈은 계속 간직할 겁니다.
2025년 너무 너무 고생했고요, 2026년 다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종종 연락드릴게요 다들.
어쩌다보니 새 출발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한 발 늦게 새 출발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겠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요.
이제 26살이네.. 고생했고, 늘 응원한다. 힘들 때마다 회고록에 들어와서 힘 얻고 가는 거 알고 있다. 너 이미 최고야. 잘 하고 있어. 적당히 힘들어하고 다시 할 일 하러 들어 가. 가끔 사람들한테 기대도 되고 그래. 멈추지만 않으면 돼. 잘 하고 있어.
마지막은 늘 전통처럼 한 해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 소개 하기로... F1더무비에 나온 <Lose My Mind>입니다. '다 뒤졌다'하며 몰입하게 만드는 이 노래는 올 한 해 큰 힘이 되었습니다.
P.S. 다시는 회고록을 소설처럼 쓰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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