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살구클럽>, 그저 응원할 수 밖에 없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들지만, 그 계기는 매번 달랐다. 이번에는 내가 요즘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고, 책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해 보였다. 논문을 읽다 보면, 이 논문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위한 읽기가 우선 시 되어야 수월하다. 하지만, 내가 읽는 방식으로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줄 한 줄 면밀하게 파고들고, 기억하려 하고, 모르면 더 파고, 정리하고, 한 편의 논문을 읽기 위해 그 밑바닥까지 가려고 한다. 좋은 습관으로 보이지만, 난 이 습관 내지는 버릇 때문에 괴롭다.
독서의 근거를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라 이 문단으로 계기는 끝내겠다. 아무튼 나는 글을 숲의 나무 한 그루 보듯이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숲을 보고 싶어서, 전체를 보는 습관도 들이고 싶어서 독서를 하게 되었다. 독서의 효과를 봤던 건 이 뿐만이 아니다. 매일 자기 전에 책을 읽었었는데, 잠도 참 잘 오고 핸드폰과 잠깐 거리를 두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을 계기로 꾸준히 독서를 해보고 싶다.
이번에 고른 책은 노래들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된 한로로의 <자몽살구클럽>이다. 앨범과 동명의 소설인데 소설에서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이 노래와 접점이 있다 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고, 우연히 서점에 들렸을 때 발견한 이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얇은 책이라 읽어보고 싶었다. ‘시간을 달리네’, ‘0+0’의 가사를 좋아했고, 이를 곱씹으며 자주 들었던 노래들이 소설과 어떤 연결이 되는지 궁금증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데에 들었던 시간은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잘 읽히기도 했지만, 읽으면서 몰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 항상 작가들에게 감탄하게 되는 점들은 공간, 시간, 감각에 대한 묘사이다. 그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상상을 하고 몰입에 발판이 되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묘사 덕에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던 책이었다.
특히, 어떤 감정들에 고조를 표현하는 방식이 참 기억에 남았다. 동일한 단어들의 조합을 가지고 같은 의미를 가진 문장들을 반복하면서 이를 표현한다. 보현이와 엄마가 마지막에 주고받은 대화, 소하가 아빠를 죽였을 때, 같은 의미의 문장 반복일 뿐인데 어찌 작가의 의도를 잘 전달 받을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각자의 이유로 죽고 싶다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 자몽살구클럽의 목적은 의아하게도 부원들이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죽고 싶다는 이유로 모였지만 왜 살고 싶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태수였다. 태수는 겉보기에 되게 밝고 학생회장까지 하는 친구가 어쩌다 죽고 싶었고, 더 나아가서 왜 동아리까지 만들며 살고 싶었을까. 태수의 이야기에서 이를 면밀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대략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동아리까지 만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혼자가 외로워서? 그 외로움을 견디고 싶어서? 여기까지 혼자 곱씹어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수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버텨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죽음을 마음에 품은 것과 그 마음을 품은 것이 혼자라 느껴지게 만드는 외로움을 분리해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태수의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그가 죽고자 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 했던 게 아닐까. 겉과 속이 다르고, 그 속을 잘 표현하지도 않는 인물을 해석하려 하는 건 어려웠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표면적인 위로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는 건 조심스럽다. 개입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도 책임이 생긴다. 이러한 무거운 문제에 개입하라니, 도와주는 사람에게도 큰 부담이다.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가나. 하지만, 그 문제가 얼마나 무거운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그저 살고 싶은 이유를 찾기 바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나.
개인의 삶을 이어가는 문제는 결코 다른 누군가 해결할 수는 없다. 작가의 말에서 어디에 있을 태수, 유민, 보현, 소하를 응원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되는 말인 듯 하지만, 아니다. 나도 그런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응원한다. 다른 누군가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비단 위에서 말한 개입한 자의 책임 때문만이 아니다. 그 문제의 근원은 본인만이 찾을 수 있다. 찾은 후에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누구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즉,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없으며, 그 근간은 개인이 직접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에 있다. (당연히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에 있어서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끝내 직접 문제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소하는 그런 면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했고, 그제서야 살고 싶다며 목 놓아 울었다.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의 문제에 대한 원인을 찾았고, 이를 해결했지 않은가. 소하의 그 이후가 궁금했다. 작가가 열린 결말처럼 끝낸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끝임을 암시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궁금했다. 소하는 이후에 어떤 삶을 살 지보다는 행복한지, 여전히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지.
그저 응원할 수 밖에 없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라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또 문제를 잘 찾아 해결하기를, 그리고 끝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가볍게 쓰려한 글인데, 재밌고 빠르게 읽었던 것에 비해 주제 자체가 무거웠던 지라 첫 독후감을 쓰는 건 꽤 어려웠다. 다음 책은 새로 산 책은 아니고, 원래 있던 책인데 읽고 안 읽기를 반복해서 다시 처음부터 읽고 있는 책이다. 한국 소설은 아니고 해외 소설인데, 확실히 번역된 문장 탓인지, 언어의 톤이라는 장벽 탓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내용 자체가 이런 것인지, 와닿지 않는 포인트들이 곳곳에 있다. 그래도 궁금한 책이라 읽어보고 있다. 이로 독후감을 마친다.